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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 3월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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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료]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

◈ 26일(월)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려 ◈

 

□ 중국 하얼빈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이 26일(월) 오전 10시,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열린다.

 

□ (사)안중근의사숭모회(이사장 김황식)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모식은 심덕섭 국가보훈처 차장, 유족(황은주(외손녀), 안도용(증손자)), 안중근함 부함장 정창식 중령 등 승조원 및 안중근의사숭모회 회원, 시민 등 500여 명이 참석한다.

 

□ 추모식은 약전 및 최후의 유언 봉독, 참석 내빈의 추모사,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전국 학생 글짓기대회 수상자 시상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 특히 이날 행사에는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를 연구하고, 기리며, 존경하고 있는 교수, 변호사 등 30여 명도 참석할 예정이다.

 

   - 도쿄 호세이대학 마키노 에이지(牧野英二) 교수, 가노겐(鹿野元) 변호사, 시마네현의 고마츠 아키오(小松昭) 인간자연과학연구소 이사장, 미야기현의 오노데라 쿠니요시(小野寺邦義) 사담회 회장, 사가현에 안중근의사 동양평화기원비를 건립한 야마사키 케이코(山綺惠子) 일행 등



◈ 식   순◈

■ 국민의례
■ 약전 봉독 / 이영옥 기념관장
■ 최후의 유언 낭독 / 안중근함 승조원 대표
■ 추모식사 / 김황식 이사장
■ 추모사 / 차장, 박유철 광복회장
■ 헌시낭송 / 글짓기대회 운문 최우수상작
■ 추모공연 / 강태을, 리사(뮤지컬 ‘영웅’ 안중근役 등)
■ 글짓기대회ㆍUCC공모 수상자 시상 / 차장, 이사장
■ 헌화 / 참석 내빈
■ 안중근의사 추념가 제창 / 역사청소년합창단
■ 폐식



◈ 안중근 의사 공적 ◈

 

  안중근 의사(1879. 9. 2.~1910. 3. 26.)는 황해도 신천 사람으로, 1905년 을사늑약 후 중국 상해로 건너 가 국권 회복의 길을 강구하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돌아와서 사재(私財)를 털어 삼흥학교(三興學校)ㆍ돈의학교(敦義學校)를 세워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러나 광무황제의 폐위, 군대의 해산 등 나라가 식민지 상태에 이르자 다시 해외로 나가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며, 1908년에는 의군장이 되어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함경북도로 진입하여 경흥ㆍ회령 등지에서 대일 항전을 전개하였다.


  그 후 다시 러시아령의 블라디보스톡ㆍ연추(煙秋) 등지를 왕래하면서 동지들과 구국의 방도를 모색하였고, 1909년 봄에는 김기룡(金起龍)ㆍ조응순(趙應順)ㆍ황병길(黃柄吉) 등 동지들과 함께 손가락을 잘라 ‘단지동맹’을 결성하여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맹세하였다.


  1909년 9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톡에서 일제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의거 당일인 10월 26일 9시경, 하얼빈역에서 러시아 군인들의 경례를 받으며 각국 영사들이 도열해 있는 곳으로 걸어가고 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향해 총을 쏘아 3발을 모두 명중시켰다.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하려고 하자, 하늘을 향해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크게 세 번 외쳤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1월 러시아 헌병대에서 여순(旅順)에 있는 일본 감옥으로 이송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는 가운데에서도 일본의 부당한 침략 행위를 공박하며 시정을 요구하였고, 조국의 완전 독립과 동양 평화의 정착을 주장하였다.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은 후, 3월 26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본 저작물은 국가보훈처에서 '2018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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