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마리아(1892. 6. 18. ~ 1944. 3. 13.)선생을 2019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선생은 1892년 6월 18일 황해도에서 태어났으며, 마리아는 개신교의 세례명인데 독실한 개신교신자였던 아버지가 지어주신 것이다.
1918년 1월 8일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이듬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일 동경 유학생들은 이를 한국 독립의 절호의 기회로 이용하고자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바로 동경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계획이었는데, 여기에 선생과 황애덕(黃愛德)을 비롯한 여자 유학생들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선생은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하여 옷 속에 감추고는 현해탄을 건너 2월 17일 동경을 출발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다.
이어 교육계·기독교계·천도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재일 동경 남녀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보고하면서 국내에서의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촉구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난 날에도 선생은 여성들에게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였고 선생은 그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학생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출감 후 선생은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조국 독립의 꿈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
선생은 정신여학교 동창과 교사들이 중심이 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의 조직과 활동 상황을 알게 되었다. 선생과 임원들은 애국부인회의 조직 확대와 여성 독립운동의 활성화 방안을 논의한 뒤, 그를 위한 선행 조치로 선생을 회장, 황애덕을 총무부장으로 선임하였다.
이후 중국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상해에서의 독립운동의 난맥상과 분열에 실망한 선생은 못다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하고, 1923년 6월 21일 미국 유학을 위해 상해를 떠나게 되었다. 선생은 이같은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2월 12일 황애덕·박인덕 등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하였고,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고문 후유증이 재발함에 따라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중, 1944년 3월 13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본 저작물은 국가보훈처에서 '2019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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