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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의거 관련 러시아 극동지역 신문기사 수집·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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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지 않다.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너희들에 의해 병들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의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 


 일제의 첫 심문부터 사형집행까지 안중근 의사의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과 발언 내용 등을 소개한 러시아 언론 보도가 확인되었다.  


□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28일 설립 50주년 및 공공기록물법 제정 20주년을 맞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하바로프스키 등의  지역신문이 보도한 안중근 의사 관련 기사 24건을 수집·공개한다. 


 공개된 기록물은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5년 독립운동과 우리 동포 관련 기록물이 다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대상으로 기획·수집하던 중 발굴된 것인데, 안 의사 의거일 다음 날인 1909년 10월 27일부터 1910년 4월 21일까지 안의사 관련 보도이다. 


 그동안 안중근 의사 관련 러시아 신문기사가 단편적으로 소개된 적은 있으나, 러시아 극동지역 여러 신문의 관련 기사를 망라하여 공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특히 이들 신문에는 시종일관 의연했던 안중근 의사의 모습,  차이쟈고우에서의 의거 준비, 체포과정,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인식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어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


 「달리니 보스톡지(紙)」는 의거일 이틀 뒤인 1909년 10월 28일자에 26일 아침 9시 최전선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하얼빈역에 도착한 이토 공작(당시 조선 통감)은 치명적 총상을 입었고, 조선인으로 밝혀진 범인이 체포되었다고 보도했다.(아래 번역문 참조) 


이토 공작 암살


하얼빈, 10월 13일(10월 26일) 아침 9시에 최전선 열병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브체브이와 러시아 지도자들이 이토 공작과 함께 기차 칸에서 내리는 순간, 내국인들과 외국 영사들이 있는 쪽 마지막 등쪽, 브라우닝 권총으로부터 몇 발의 총알이 발사되었고, 이토 공작은 치명적 총상을 입었고, 남만주철도개발대표 다나카는 발에 작은 상처를, 하얼빈 일본총영사 카와카미는 중상이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며, 황궁 개인비서대신 모리는 경상을 입었다. 조선인으로 밝혀진 체포되었고, 심문에 응했으며,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공작을 살해하기 위하여 특별히 도착하였으며 공작이 조선에 있는 동안 자신의 친지들을 몇명 사형에 처했다고 하였다. 이번 사건을 분명히 사전에 계획한 것이었다. 


어제 차이쟈고우 역에서 러시아경찰은 브라우닝 권총을 소지한 3명의 조선인을 체포하였으나 위험을 사전에 경고하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왜냐하면 전날, 총영사 카와카미가 철도청에 요청하기를 모든 일본인들이 자유롭게 출입하도록 요청하였다는 것이다. 외모상으로 범인을 일본인과 구분하기는 절대 불가능하였다. 공작을 수행한 모든 러시아 시민들도 똑같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공작과 중상을 입은 일본인들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던 재무장관은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오늘 공작의 시신은 재무장관과 철도청 대표의 조의 화환을 관 위에 얹고 남쪽으로 향했다. 모든 거리에는 애도가 이어졌다. 북경주재 러시아 대사 코로스토베츠는 직접 공작의 시신을 관첸츠이까지 운구하였다. 그의 명령에 따라 묵젠과 달리니에서는 모든 러시아 외교관들이 시신을 맞이하였다. 재무장관은 동경주재 러시아 대사를 통하여 일본 정부에 비통한 심정을 전하였다. 


하얼빈. 3발의 총알을 맞고 약 20분 후 공작은 사망하였다. 시신은 11시 40분에 남쪽을 향하였다. 관첸츠이까지 국경수비대 장교들의 애도와 경호를 받으며 옮겨졌으며 러시아 대사 코로스토베츠, 철도청 대표와 대표자들에 의해서 보내졌다. 시신이 열차를 통해 보내진 직후 재무장관 코코브체브이는 러시아 철도병원을 방문하여 부상당한 카와카미를 위로하였고, 이후 일본영사관을 방문하여 동시에 방문한 하얼빈 수뇌부와 함께 애도의 뜻을 전하였다. 어제 러시아 차이쟈고우 철도역에서 체포된 3명의 조선인들은 이 역에 암살을 목적으로 체류하였다고 밝혀졌다. 


차이쟈고우 역에서 체포된 조선인들은 어제가 오늘 동일 역에서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공작의 시신이 실린 특급열차가 되돌아 가는 것을 보는 과정이었다. 작은 역에 용의자가 세 명이나 나타난 것을 수상히 여긴 지역 헌병대가 체포하게 되었다고 한다.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그들 중 2명은 억류중이라고 한다. 세 번째 용의자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한다. 억류되고 체포된 자들은 자신들이 이토의 암살을 모의한 무리에 속해있다고 인정하였다. 하얼빈에 파견된 헌병대는 살인-세번째 용의자도 차이쟈고우 역에 있었다고 한다. 하얼빈에서의 심문 중에 억류자들은 자신들의 암살 가담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자신들의 권총에 장전된 총알이 이토의 암살에 사용된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은 인정하였다.



 「쁘리 아무리예지(紙)」 11월 2일자는 10월 24일 정오, 하얼빈에서 남쪽으로 가는 차이쟈고우의 우편열차 정거장에서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이 내리는 것부터 다음날 아침, 거사를 위해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떠날 때 서로 눈물을 흘리며 큰 절로 인사하는 장면까지 르포형식으로 게재했다. 아울러 일본 총영사관에서 있었던 첫 심문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당신들의 고문도 두렵지 않다. 나의 이성과 심장은 조국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병을 얻었다. 죽으면서 나는 기쁘다. 나는 조국 해방을 위해 첫 번째 선구자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 안 의사의 진술을 실었다.


  「보스토치나야 자랴지(紙)」 11월 4일자는 “이토 사살은 우리 조국 역사의 마지막 장이 아니며, 아직 살아 있는 것이 기쁘며, 나의 유골에 자유가 비출 것이다.”라고 말한 안 의사의 진술을 그대로 실었다.


□ 신문들은 안중근 의사가 현장을 지휘하는 러시아 장교에 의해 기차역으로 옮겨진 뒤 감옥으로 이송되는 과정도 상세히 보도했다. 


 「쁘리 아무리예지(紙)」11월 6일자는 1일 있었던 이송상황을 구체적으로 전하고 있다. 기차에 오르는 안중근, 우덕순, 조도선의 발에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안중근은 손에 수갑까지 채워져 있었다. 열차에는 마지막으로 안중근이 올라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였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완전히 무관한 모습을 보였다고 묘사했다.


□ 또한 신문은 안중근 의사의 법정진술과 사형선고 당시의 상황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쁘리 아무리예지(紙)」 1910년 2월 27일자는 사형을 선고한 2월 26일 재판 상황에 대해 보도하였는데, 1시간 동안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였고,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마음이 끌리는 것 같았으며, 안중근의 어머니는 가치 있는 죽음을 맞이하라는 마지막 인사말을 전한 것으로 보도하였다.


□ 특히,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와 관련된 보도기사가 주목을 끈다. 「우수리스까야 아끄라이나지(紙)」 1910년 4월 21일자는 안중근 의사는 사형 직후 교도소의 예배당으로 옮겨졌다가, 지역의 기독교 묘지에 매장된 것으로 보도하였다.(붙임 6 번역문 참조) 종전 안중근 의사의 매장지는 교도소 내의 묘지로 알려져 있었다.


□ 이번 공개와 관련 이소연 국가기록원장은 “안중근 의사와 하얼빈 의거에 대한 러시아의 인식뿐만 아니라, 의거 준비, 체포와 일본영사관 인계과정 등 사후 조치 과정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안다.”라며, “안중근 의사 의거 110주년을 맞아 독립정신을 실천했던 안 의사의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국민과 함께 하고자 공개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본 저작물은 행정안전부에서 '2019년'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보도자료를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정책브리핑 사이트 www.korea.kr 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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